가을의 길과 순례자의 마음을 떠올리며 ‘길·침묵·자기 발견’이라는 모티프로 써봅니다.
가을의 순례자
가을이 오면
나는 길을 생각한다.
멀리 떠나는 길이 아니라
오래 걸어온 내가
잠시 멈추어 서는 길.
낙엽 하나가
발끝에 내려앉을 때마다
지난날의 내가
한 장씩 떨어져 나간다.
나는 무엇을 찾아
그토록 서둘렀을까.
성당도 아니고
별도 아니고
누군가의 대답도 아니었다.
어쩌면 길은
무언가를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러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조금 천천히 걷는다.
바람이 불면
바람과 함께 걷고,
비가 오면
비를 피하지 않고,
길을 잃으면
잠시 서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바라본다.
그리고 문득 알게 된다.
목적지에 도착해야
순례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걸어온 모든 길이
이미 나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가을 저녁,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지고
나는 빈손으로 걷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볍다.
아마도 순례란
무언가를 얻는 여행이 아니라
마침내
나에게 꼭 필요한 것만 남기는 여행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길은
아무 말이 없다.
나는 그 침묵을 따라
조금 더 걷는다.
가을은 깊어지고
나도 조금씩
나에게 가까워진다.